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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미술실

고고 미술실

고고 미술실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이후 우수한 민족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고고․미술실. 암사동에서 출토된 대형빗살무늬토기, 섬세한 기하학문양이 뛰어난 국보 제141호 청동잔무늬거울과 청동기의 제작과정을 알려주는 국보 제 231호 청동기 거푸집은 우리 박물관만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그 외 삼국시대 낙랑 관계 유물, 삼국시대 이후의 공예작품들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 대형빗살무늬토기 Comb-pattern Pottery
* 국보 제141호 청동잔무늬거울 Bronze Mirror with Geometric Designs, National Treasure No.141
* 국보 제231호 청동기 거푸집 Mould for Bronze Artifacts, National Treasure No.231
* 낙랑 Lolang

고고·미술실에는 매산(梅山) 김양선(金良善)의 수집유물과 1960년대부터 본 박물관이 수행한 여러 유적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토기류, 석기류, 금속기류, 유리제품 등 600여점의 유물을 시대별·주제별로 구성, 전시하여 선사 및 고대 문화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암사동유적 출토 대형빗살무늬토기[大形櫛文土器]와 전(傳) 충남 논산출토 청동잔무늬거울[靑銅多 細文鏡, 국보 제141호], 그리고 전남 영암출토 청동기거푸집[靑銅器鎔范, 국보 제231호] 등이 있는데, 특히 청동잔무늬거울과 청동기거푸집은 한국 청동기의 정교함과 제작기술의 우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 박물관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외에 장옥(葬玉) 등을 비롯한 중원문화의 색채가 깊이 베어 있는 낙랑(樂浪) 유물 역시 타 박물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있는 유물입니다.

전시주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가 기원전 57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각각 건국되어 주변세력들을 통합하고 고대국가로 발전되어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곽과 대형 고분의 출현, 특정 토기양식의 일정한 분포 등 고대국가의 성립을 드러내는 고고학자료는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고구려의 발흥지로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는 환인(桓因)지방과 국내성(國內城)이 있는 집안(集安)지방에서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 늦어도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축조되고 있었으며, 고구려 토기의 성립을 보여주는 노남리형토기는 기원후 1세기에 출현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서기 1세경에는 왕국으로 발돋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 쟁투를 벌이며 요동 요서지방으로 진출을 꾀하였고, 313년에는 낙랑군을 멸망시켰다.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남방진출을 본격화했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성장해가고 있던 백제는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의 축조, 봉토분(封土墳)의 등장, 검은간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의 형성으로 보아 3세기 중 후반경에 왕국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만큼 강성했던 백제는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475년 웅진(熊津), 523년 사비(泗沘)로 천도하였으나, 중국 남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켜 갔다. 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해간 신라는 3세기 후반경 신라식이라고 할 수 있는 덧널무덤[細長方形木槨墓]을 출현시켜 그 정체성을 드러내었고, 월성(月城)이 축조되고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신라양식토기가 4세기 중엽경에 출현하여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6세기에 들어와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일신한 신라는 낙동강 서쪽의 여러 가야세력을 차례로 통합하고, 이어서 6세기 후반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삼국 사이의 치열한 경쟁에 휘말리게 되나 결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영산강유역의 독널무덤 독널[甕棺]은 사람의 시신이나 뼈를 토기에 안치하여 널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독널무덤[甕棺墓]은 신석기-청동기시대에 일상용의 토기 하나만을 바로 세워 묻는 외독널[單甕棺]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초기철기시대에 두개의 항아리 아가리를 맞대어 뉘어 놓은 이음독널[合口式甕棺]이 등장하면서 점차 널리 쓰이게 되었다. 원삼국시대에도 독널무덤은 널무덤이나 덧널무덤과 함께 널리 쓰이지만 집단적으로 군집하여 조성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부수적인 무덤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는데 특이하게 영산강유역에서만 무덤이 대형화되면서 군집을 이루는 이른바 ‘옹관고분(甕棺古墳)’으로 발전하게 된다. ‘옹관고분’은 주로 평지에 입지하고, 커다란 분구안에 여러 개의 독널이 매장되었으며, 분구 주변에 묘역(墓域)을 나타내는 도랑[周溝]이 돌려지는 특징이 있다. 또한 매장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전용독널이 사용되고, 이를 덮는 분구가 원형이나 방형으로 정형화되며, 분포지역이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 일대로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이와같은 독특한 문화현상은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유력한 토착세력의 존재, 곧 마한잔여세력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옹관고분’은 나주 반남지역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루지만 이 지역에 돌방무덤[石室墳]이 수용되면서 차츰 쇠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