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역사실 (1층)
한국 기독교 역사실
한국 기독교 역사실
한국기독교역사실은 우리 박물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시실입니다. 통일신라시대 한반도에 유입된 경교 관련 유물을 통해 한국기독교 역사의 시원(始原)을 추적해볼 수 있으며, 천주교와 개신교의 주체적 수용과 발달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외국선교사가 공식 입국하기 이전에 한국인들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나아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 출판하여 읽었다는 특수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 유물은 한국기독교의 수용과 성장 및 발전과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景敎 Nestorianism)로부터 시작합니다. 7세기 중국에 전래되어 크게 융성했던 경교가 당시 당(唐)과 활발히 교류했던 통일신라에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 천주교는 18세기말 서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에 머무르지 않고 천주교 신앙까지 수용하려는 학자들에 의해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천주교 신봉자들은 외국인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조선천주 교회를 설립하여 자생적인 신앙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한불조약(1886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약 100여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 개신교 역시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일방적인 선교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자체적으로 신앙공동체를 건설하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개화운동 및 민족운동과 결부되면서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역사실에는 경주 불국사 안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등 경교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비롯하여 초기 천주교 교리서와 신앙서적, 박해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여 천주교의 수용과 성장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개신교의 수용 및 발전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초기 성경을 비롯하여 각종 찬송가와 외국선교사 관련유물, 일제하 한국교회와 신앙운동 관련유물을 전시하여 한국근대사에서 개신교의 발전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전시주제
천주교는 명대(明代)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중국사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양란을 겪으며 사회변화에 대한 자각의 움직움 속에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연행사절단에 의해 서구 과학지식과 문물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천주교가 조선사회에 전래되었다. 초기 천주교는 ‘신앙적 체계’보다는 ‘학문적 관심’, 즉 서학(西學)의 차원에서 조선사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 관련서적이 전해지면서 점차 종교로서 신봉되기 시작하여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산은 전통적 유교사회를 동요시켰으며,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보수세력으로부터 갖은 박해를 당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박해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거치면서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고 조선 천주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 열정과 고귀한 희생은 오히려 천주교의 확산과 성장을 가져왔다. 초기 천주교회를 주도했던 양반층과 지식인층의 역할은 점차 중하층의 일반 교인들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피신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면서 천주교 신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천주교신앙의 성숙 17세기 초 입연사행(入燕使行)을 통해 호기심 단계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 서적은 18세기 중엽부터 이익·홍대용 등과 같은 실용적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 탐구 과정에서 서학의 사상적 근거로 등장한 서교, 즉 천주교까지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권철신·권일신·정약용·정약종·이가환·이 벽·이승훈 등은 서학의 사상적 근거인 천주교 신앙을 직접 실천하고자 하였다. 주로 정치권의 소외된 기호(畿湖)지역의 남인계(南人系)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1777년 ‘서학교리연구회’를 조직하고 신앙실천에 나섰다. 권철신·정약용·이 벽을 비롯한 수명의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광주군과 여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앵자산(鶯子山) 중턱에 위치했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라는 사찰에 모여 서학과 천주교 관계 서적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아침 저녁기도, 주일(主日)의 노동금지, 금육재(禁肉齋) 등 천주교에서 요구하는 몇 가지 계율을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서적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서 연구되기 시작한 천주교 교리는 이들의 신앙적 고백이나 실천으로까지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