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 (2층)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
한국근대사와 관련한 희귀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입니다. 이곳에서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으며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인식했던 한국의 근대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17세기 이래 도입된 서양과학기술서적과 문물, 실학자들의 각종 저서와 고지도에서 조선후기 사회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으며, 안중근 의사의 친필 글씨 등 독립운동자료는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느끼게 해줍니다. * 안중근의사 친필 글씨 Calligraphy by An Jung-geun
조선 후기 실학(實學)이 등장하고 서양문물, 곧 서학(西學)의 수용으로 전통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사회는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사회는 시대적 변화에 상응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고 불평등조약으로 대외개방이 가속화되면서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개화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개혁이 시도되고,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러 애국계몽단체들이 자주적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매진하였으나 일제의 무단침략으로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일제강점하에서 우리민족은 일제의 경제적 약탈과 강압에 굴하지 않고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의 잔혹한 민족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 보전 및 국가 독립을 위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실에는 이와같은 전통과 근대, 척사와 개화, 민족운동과 저항이라는 근대사의 갈등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한국근대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서양의 천문지리 관련유물 등의 서학자료와 실학자료를 통해 근대의식의 형성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고, 타율적 개항에 의한 세계질서로의 편입과정에서 봉건과 반봉건 움직임, 외세의 침략과 민족의식의 성장, 개화운동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 이후 3 1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운동자료와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자료에서 굴절된 식민지 역사를 개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전시주제
농경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의 하나가 천문과 지리에 관한 이해였다. 그러나 그들의 천문지식과 세계지리에 대한 이해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연행사신(燕行使臣)들에 의해 중국에 자리잡은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과학기술과 지식을 접하게 되면서 천문지리에 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에 서양의 천문지리 지식이 소개된 것은 1631년(인조 9년) 정두원(鄭斗源) 일행이 명(明)으로부터 천문서적을 들여오면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의 천문지리학은 당시 실학자들에게 수용됨으로써 점차 중국중심의 세계관이 허물어져 갔고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이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조선의 인문지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되었고, 지도 제작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천문지리학의 발전은 조선인들의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혀주어 근대적인 의식의 성장에 바탕이 되었으며 결국 봉건적인 조선사회에 동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지리서의 편찬 조선후기 천문학의 유입과 함께 지리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고 있었다. 인문지리학의 연구는 조선왕조 후기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려했던 실학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를,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저술하였고,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를 통해 각 도시의 경도와 위도를 밝히고, 조선의 인문지리적 특성을 연구했다. 최한기(崔漢綺)는 천체와 지구상의 자연·인문지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지구전요》(地球典要)을 저술하였다. 이렇듯 실학자들은 중국을 통해 세계 문명을 접하고, 세계지리학을 수용하여 지리연구를 심화시켰다. 대한제국기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용 세계지리서가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