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 역사실 (2층)
숭실 역사실
숭실 역사실
숭실역사실에는 1세기가 넘는 숭실대학교의 자랑스런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1897년, 미국 북장로교의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어 1906년 한국 최초로 대학교육을 실시하였고 신문화 수용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투철한 민족정신과 신실한 기독교정신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며 자진폐교했던 숭실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 베어드(W.M.Baird, 裵緯良)
평양숭실역사
1897.10 | 평양 신양리 26번지에 학생 13명으로 숭실학당 출범.
초대 교장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M.Bai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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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60여 명 지원에 18명 학생 선발 |
1900.1 | 5년제 중학교 학제 확정 |
1900.3 | 학생전도대 조직 |
1901.10 | 평양부 신양리 39번지로 교사 신축 이전 |
1904.5 | 숭실중학 제1회 졸업생 3명 배출 |
1906.10 | 미국 장로교·감리교 합동으로 대학부 설치 교명은 평양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 |
1907.1 | 첫 교가 제정 |
1908 | 대한제국 학부(學部)로부터 ‘숭실대학’ 인가 숭실대학 1회 졸업생 2명(변인서·김두화) 배출 |
1910 | 교가(모란봉이∼) 제정
105인사건으로 숭실출신 15명 실형언도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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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3 | 숭실대학 교사(3층 벽돌 양옥) 기공 |
1912.11 | 사립학교 규칙에 의거 ‘숭실대학’ 재인가 |
1913.1 | 음악대·합창대 조직 |
1914.10 | 숭실대학 문학부 조직 |
1915.4 | 라이너(R.O.Reiner) 2대 교장 취임 |
1915.9 | 《숭실학보》창간 |
1917.3 | 숭실 출신이 중심이 되어 항일비밀결사 ‘조선국민회’ 조직 |
1918.4 | 마펫(S.A.Moffett) 박사, 3대 교장 취임 |
1919 | 《숭대시보》창간 |
1921.1 | 학생기독청년회 창립 |
1923.5 | 전조선축구대회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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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3 | 일제의 교육정책에 의해 전문학교로 개편 |
1928.5 | 매퀸(G.S.McCune,) 박사, 4대 교장 취임 평양 신양리에 실습농장 개설 |
1930 | 학생잡지 《숭전교우》 창간 |
1931.3 | 3년제 농과 설치(정원 30명) |
1932.7 | 고등농사학원 부설 |
1936.1 | 일제, 신사참배에 반대한 매퀸의 교장직 박탈 |
1936.3 | 모우리(E.M.Mowry) 박사, 5대 교장 취임 |
1937.10 |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폐교원 제출 |
1938.3 | 일제에 의해 정식 폐교 |
서울숭실역사
1954.5 | 재건 숭실대학 개교(임시교사:영락교회, 초대학장:한경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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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6 | 신축교사 이전(상도동) |
1960.4 | 4·19 혁명시 김창섭(사학과 4년) 순국 |
1967.10 |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 준공,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개관 |
1969.9 | 대학 최초로 전자계산기 도입, 부설 전자계산연구소 설치 |
19710.3 | 대학 최초로 전자계산학과 신설 |
1971.1 | 대전대학과 통합하여 ‘숭전대학교’로 개명 |
1971.12 | 종합대학 승격 |
1972.1 | 대학원 설립 인가(1974년 박사과정 개설) |
1972.2 | 김형남 박사, 초대 총장 취임 |
1975.10 | 한국기독교박물관 신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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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2 | 대전캠퍼스가 한남대학교로 분리 운영 |
1983.7 | 중앙도서관 준공 |
1983.10 | 국내 최초 중소기업대학원 설립 |
1987.3 | ‘숭실대학교’로 교명 환원 |
1988.3 | 정보과학대학원 설립 |
1991.10 | 본교 상징탑 백마상 건립 |
1992.3 | 사회교육원 설립 |
1996.3 | 국내 최초 정보과학대학 발족 |
1996.4 | 숭실대학교 헌장 제정 |
1996.11 | 국제통상대학원 설립 |
1997.10 |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 |
2005.7 | 형남공학관 준공 |
2012.6 | 한국사이버대학교 인수 |
2014~2015 | 교육부 대학구조개혁평가 최우수 A등급 |
전시주제
숭실의 민족운동과 폐교 근대적 문물수용에 앞섰고, 항일의식이 강했던 평양에서 출범한 숭실대학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적 자존과 양심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한말 외교권 박탈에 항거하여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많은 졸업생들이 신민회(新民會)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일제강점하에서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주도하였으며, 평양지역의 3ㆍ1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학생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193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숭실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1938년 자진 폐교하여 기독교의 진리와 민족혼을 지킴으로써 '기독교대학'이자'민족대학'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