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격문
1866년 천주교박해에 따른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략하자 충훈부창의사(忠勳府倡義士) 등 89명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양이(洋夷)와 이양선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한 격문으로, 이용순(李容舜) 외 10명의 서명자 표기가 있다. 서양인의 침략으로 비롯된 피해 상황과 이에 대한 정당한 방어 및 의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천주교도가 외국세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천주교의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28
권철신 서찰
시대 조선시대
권철신 서찰
권철신 (權哲身, 1736∼1801)은 유학자이자 천주교인으로 교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이다. 이익의 문인으로 남인계 학자들과 서학교리연구회를 가지면서 중국에서 전해진 철학·수학·종교 등을 연구하였으며, 이승훈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정약전·정약용·이벽 등 남인계 실학자들과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1777년 ‘교리연구회’를 조직, 서학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 정약종, 이승훈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15
령셰명쟝
시대 조선시대
령세명쟝
1790년 한국 최초의 신부 이승훈(李承薰, 세례명 베드로 白乭)이 정약종(丁若鍾)에게 수여한 영세명장이다. 영세자 이름, 생년, 세례명(위오사뎡)을 적었으며 좌측 하단에 ‘이승훈’의 낙관이 찍혀 있다.
19
사교금지공문
시대 조선시대
사교금지공문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인의 활동을 규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23
수선전도
수선전도
북경(北京) 시가지 지도로 사각의 성곽 안에 위치한 왕성(王城), 가옥, 하천, 도로망을 지명과 함께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사신들이 방문하던 천주당(天主堂)이 지도 중앙 우측에 자리잡고 있다. ‘수선’(首善)이란 수도(首都) 또는 서울을 뜻하는 《한서漢書》에 “建首善自京師始” 나온 것으로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의 수선은 중국의 수도 북경을 뜻하는 말이다.
16
한일통상조약체결기념연회도
시대 조선시대
한일통상조약체결기념연회도
1883년 한국과 일본이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관계자들이 모인 연회(宴會) 장면을 도화서(圖畵署) 화원 안중식이 그렸다. 건너편 좌측 끝에 당시 외교고문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穆麟德), 중앙에 김옥균, 우편 끝에 묄렌도르프 부인, 좌편 모퉁이에 홍영식, 전면 좌편 끝에 다께조에(竹添進一郞) 일본공사가 있다. 서양식 연회가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고, 건너편 조선측 인물을 일본측 인물보다 두 배 가까이 크게 그린 것에서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은 화법이 그대로 유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서양식 상차림이 도입되었음을 알려주는 최초의 그림으로 주목받고 있다.
163
연행도
시대 조선시대
연행도
조선의 사신들의 연행과정 및 중국 연경(燕京)에 가서 활동하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부연(赴燕)시 연로(沿路) 및 조공 절차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모두 13폭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상단에 제목을 부기하여 놓았는데 박락되어 잘 보이지 않거나 지워진 경우도 있다.
441
견도
시대 조선시대
견도
한국에서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초기의 작품이다. 서양화의 전래는 17세기부터이지만, 서양화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부터이다. 처음에는 서양화의 음영법(陰影法)을 이용하여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희영(李喜英, 1756-1801) 때에 와서 완전한 서양화가 그려졌다. 이희영은 예수상(像)을 그린 사실이 발각되어 사형당한 천주교 신자로, 박해과정에서 천주교 성화를 주로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림 우측에 이희영의 약력과 이 그림이 서양화법의 효시임이 설명되어 있고, 좌측에는 이희영이 천주교 신앙으로 인하여 순교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40
정약종 초상
시대 조선시대
정약종 초상
조선후기 유학자이자 천주교 순교자인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의 초상화이다. 초기 천주교인의 유일한 초상화로, 같은 시대 천주교인이던 이희영(李喜英, 1756-1801)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정약종은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정약종은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한글교리서를 저술하여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천주교 신앙 연구 및 포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순교하였다.